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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함(1909~1969)의 본명은 춘함이고 자는 진백(辰伯)으로서 저쟝성 이우시 상계진 고죽당촌 사람이다.그는 11살에 《어비통감》(御批通鑒)을 읽었는데 이것은 그가 역사를 공부하는 계몽 교재로 되었다. 1931년에는 청화대학교 역학계에 파격(破格)합격되었으며 1932년에는 《청화주간》(淸華周刊)에 문학사 프로그램의 주임으로 초빙,임명되었고 1935년에는 천진 《익세보•사학》(《益世報•史學》)특집의 편집, 판면 책임자를 담당하였다.1937년 9월에 오함은 운남대학교 문학사교수로 초빙되었으며 《투하고》(《投下考》),《명대 양장 및기타》(《明代糧長及其他》),《기명실록》(《記明實錄》),《명대 한족의 발전》(《明大漢族之發展》) 등 문장을 발표하였다.1940년 서남연합대학교(西南聯合大學) 서영분교(敍永分校)에서 중국통사를 강의하였고 그때로부터 서재에서 나와 사회로 진출하였던 것이다.1943년7월에는 중국민주정단동맹에 가입하였다.같은 해에 중공에서 조직하고 영도한 “서남 문화 연구회” 활동에 참가하였고 집회에서 《공금 횡령에 대하여》(《論貪汚》),《흙에 대하여.》(《說土》),《횡령사의 한 폐지》(《貪汚史的一章》)등 언론을 발표하여 국민당 반동 통치를 규탄하였다.그는 또 문일다(聞一多)와 함께 문장을 써서 발표하고 연설하면서 국민당의 암흑 통치를 폭로하였다.1949년1월31일,북방지구만 해방되었다.오함은 북경대학교,청화대학교,청화대학교무 위원회 부주임,문학원장,역사학부 주임 등 직을 맡았으며 개국대전(開國大典)에 참가하였다.1957년에 오함은 중국공산당에 참가하였다.그는 역사연구에 힘썼는데 특히는 명나라 역사에 대한 연구가 남달리 깊었으며 우리 나라에 흔치 않는 명사(明史)전문가이다.1959년에 해서를 연구하여 그 이듬해에 역사극《해서파관》(海書罷官)을 완성하였다.1965년부터 《해서파관》,《삼가촌찰기》(三家村札記)가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1969년10월 일생을 부지런하게 정직하게 살아오신 학식이 연박한 오함은 루모로 투옥되고 감옥에서 세상을 떴다.1974년7월에 중공 북경시위는 “삼가촌반당집단”(三家村反黨集團)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었고 오함의 당적과 정치명예를 회복하였다.9월14일,중공 중앙에서는 오함,원진을 위한 추도회를 정중하게 거행하였다.
오함의 사가는 이우시 상계진 고죽당촌에 위치해 있으며 민국 초년에 지은 사합원 건축으로서 그 면적은 463.4평방미터이다.건물은 남쪽을 향해 자리잡고 다섯 칸 너비로 널직하며 중간축을 중심으로 대칭되게 분포 되었는데 상하 두층은 정당(正堂),곁방(邊房), 두 곁채 및 화원으로 구성된 나르텍스식 우물 정원이다.옛집에는 오함이 생전에 쓰던 생활 물품과 《해서파관》등 각종 진귀한 서적들 그리고 오함이 각 역사시기 사료,사진,서류 등이 진렬 되어 있다.2005년 3월16일, 절강성 인민 정부에서는 이 곳을 성급 문물 보호 단위로 공포하였다.